[북향민 사업이야기]더웰시아-남남북녀, 김명희&이인수부부이야기

2018-09-18
조회수 2864

2016년 계간 [통일코리아]에 실린 인터뷰입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통일코리안

흙수저 남한 남편, 금수저 북한 아내

김성원

계간 <통일코리아> 편집장

op_kim@naver.com

노을 지는 풍경은 어디나 운치가 있지만 부여에서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옅은 핏빛으로 스미는 노을을 배경으로 둥글게 어깨를 견 산들은 또 얼마나 아담한지. 그 가운데를 관통하는 백마강은 신고의 세월을 견뎌온 것 치고는 너무나 거대하지 않고, 평온하기만 하다. 백제에서 건너갔다는 일본의 그 자그맣고 소박한 문화의 탯줄이 여기라는 걸 딱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고 보니 필자는 부여가 초행이다. 인근 공주는 수학여행을 비롯해 갑사, 동학사를 몇 번 와봤던 것 같은데 말이다. 거기다 공주를 낀 계룡산 자락에서 군생활까지 했는데, 괜시리 미안한 생각이 스민다. 잊혀진 백제의 수도 부여는 그저 우리네 시골 읍내 같은 모습이다. 여기도 남남북녀 커플이 일곱 쌍이나 살고 있다니, 그러고 보니 3만명이 넘었다는 북향민(탈북민)은 이제 전국 어딜 가나 한두 번 건너면 만날 수 있는 가까운 이웃이 된 듯하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화사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는 여인이 바로 남한 살이 10년차인 김명희(43) 씨다. 남편 이인수(53) 씨는 가게 안에서 부지런히 토마토를 고르고 있다. 가게 이름은 ‘다사랑 웰빙나라’다. 그 옆에 ‘더 웰시아’ ‘굿뜨래 Goodtrae' 별칭이 여럿이다. 토마토, 블루베리, 칡 등 몸에 좋은 과일즙을 직접 짜서 가공, 판매하는 곳이다. 마침 식사시간이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밥을 먹으며 나누었다. “10년간은 건강원, 10년간은 칡즙으로 시작해 토마토즙, 블루베리즙을 짜서 판매하고 있어요. 지난 10년간 가랑비처럼 지내온 것 같아요.” 사업이 왕창 번성하진 않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왔다는 말이다. 이 말 속엔 불안과 불만도 포함돼 있지만 안도의 한숨도 들어 있다. 이씨는 “사람들이 꾸준히 사주니까 계속 상승세를 타는 건 맞는데 사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언제입니까?”

그러면서 신앙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신앙 이야기가 인터뷰의 절반 이상이었다. “사업상의 불만과 답답함을 매일 하나님께 쏟아내요. ‘언제입니까? 언제입니까?’ 하면서요. 그러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거죠 뭐. 그리고 아침마다 선포를 해요. ‘내 가게가 전국적으로 알려질 거다’라구요. 그게 하나님께 제가 받은 축복이니까요.” 신앙 좋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이씨의 사업 목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불신자들에게 뭔가를 보여줘서 하나님 믿게 하는 것이다. 이씨의 가게는 아직 가공 공장을 갖추지는 못했다. 당장 공장을 갖춰서 생산을 기계화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공장을 차리면 세울 간판도 미리 정해놨다. ‘사랑과 빛으로 인도하는 기업’. 누가 봐도 기독교 기업임을 공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는 살 수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 은혜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어요. 저는 제 자신을 잘 알고 있어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거든요.”


이씨는 평생 염세주의자로 살아왔다. 친구도 없고, 스스로도 희망이 없다고 믿었다. 자살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유일한 친구는 술이었다. 그런 이씨가 지금처럼 말 잘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으로 어떻게 변화될 수 있었을까? “저는 원래 입이 안떨어지던 사람이에요. 아예 입을 닫고 살았어요. 술에 의존했죠. 사람과의 관계는 아예 안했어요. 쓰잘 데 없는 자존심 때문에 20대 때 친구관계를 다 끊었어요. 그때부터 혼자 살았어요. 대인관계 그런 거는 저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단어였어요. 나를 좋아할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다는 걸 깨달았죠. 오죽 했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제가 그랬어요.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면 불행 중 불행이다. 나 같은 사람은 나 하나로 족하다. 절대 없어야 한다.’ 제 어릴 적 꿈은 바르게 사는 거였어요. 나는 시장통에서 태어났는데 시장통에 굴러다니는 거지들을 보며, 싸움질 하는 걸 보면서 세상이 너무나 싫었어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신(神)에 대해서 불평 불만을 많이 했지요. 왜 신은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면서요. 난 7남매 중 막내인데 형의 못난 점을 보면서 ‘난 절대로 저렇게 안살 거야’라고 다짐도 했었죠.”


저주의 인생, 신(神)을 만났을 때

어릴 적부터 세상도 인생도 저주했다는 그가 신기하게도 신의 존재는 알았던 것 같다. 불평 불만을 신에게 쏟아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씨는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어릴 적 불평 불만은 그거였어요. 신이 있는데 왜 세상을 이렇게 불공평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 안되는 사람은 더 안되는 것 같고, 아픈 사람은 더 아프고…. 제 눈에는 세상이 그렇게 비쳤어요. 저 자신도 그렇고 주변이 다 그런 것 같았어요. 우리 집 형편도 진짜 안좋았어요. 위에서 4남매까지는 아예 공부를 못가르쳤어요. 초등학교 좀 다니다가 다 중도에 그만뒀어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생활을 보면서 신에 대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40대 마지막에 인생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더욱 술에 의존했던 것 같아요. 그때 내 친구는 술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술먹으면 취하고, 취하면 세상도 고통도 다 잊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술을 마시다 보니까 언제부턴가 술이 저를 마시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술 중독이 된 거죠.” 중독은 그에게 절망만큼이나 끔찍했다. 헤어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는 일종의 수렁이었다.

“요양원 과장도 그러는 거예요. 중독 10년 이상, 20년 이상 된 사람들은 요양원을 나갔다가도 다시 들어온다고요. 그냥 그렇게 살다가 가는 거라고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너무 억울한 겁니다. 내가 어릴 적에 제일 듣기 싫은 얘기가 ‘착하다’는 거였어요. 착한 게 아니라 바보인데 말입니다. 사실 둘은 종이 한 장 차이죠. 그 말이 제일 듣기 싫었어요. 그래서 나 보고 착하다는 말을 하면 욕을 하고 싶었어요. 너무 억울해서 술을 마시는데 생각해보니까 술먹다가 죽으면 손가락질을 받지 않겠어요? 그 생각을 하니까 너무 억울한 거예요. 술이나 끊고 죽어보자고 생각했죠. 자살을 생각한 거죠. 그런데 그것도 제가 겁이 많아서 실천을 못했어요. 술먹고 죽으려고 쓰러졌는데 또 깨어나는 거죠. 죽으려고 술 마시고 잤는데 다시 깨어나는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중독자들은 고통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데 어떻게 고통이 없겠어요. 마약중독, 온갖 중독이 다 그런 겁니다. 그 세계에 빠지면 나올 수가 없는 거죠.”


아무도 꺼낼 수 없는 수렁에서 그를 건진 건 40대 초입에 만난 하나님이었다. 그의 말대로 성령을 받으니 꽁꽁 닫혔던 입이 열리고, 사는 게 즐거워지고, 인생의 목표가 생기더라는 것이다. 40대부터의 인생은 하나님이 이끌어 오셨고, 사업도 하나님이 이끌고 계시다는 게 이씨의 간증이다.

이씨에겐 든든하고 행복한 삶의 비결이 또 있다. 바로 아내 김씨다. “제 역량이 3이면 아내는 7이에요. 저는 저를 잘 알아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런 얘기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아내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줄까, 그것도 날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저의 기도제목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토마토 사업하느라 묶여 있지만 언젠가 아내가 제대로 활약하는 날이 꼭 올 겁니다.” 처음 만났을 때(심지어 인터뷰하는 지금도) 이씨가 하도 신앙 이야기를 많이 하자 김씨는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얼마나 정신이 박약했으면 신한테 저렇게 의지해서 살까?’ 그러면서 불쌍한 마음이 가득했다. “저는 먹고살려고 남한에 왔어요. 그러려면 밑바닥에서부터 생활해야 한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죠. 그런데 남편은 종교적인 것만 강조하는 거예요. 우리는 김일성을 신이라 믿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때는 대학생이었는데 김일성 주석이 죽었을 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신이라 믿었던 사람도 죽는구나’ 생각하면서 불쌍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도 저는 그 당시 제 힘으로 살 수 있었어요. 남한까지도 왔고요. 정신만 건강하다면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남편은 오직 신만 의지하고 너무나 나약한 사람처럼 보인 거죠.” 그런 아내,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만 관심이 많은 아내를 남편은 도리어 불쌍하게 생각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만난 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는데, 아내는 그 배설물을 붙잡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불쌍해 보였겠어요. 가련하고 기가 막히고, 한마디로 서로 불쌍했던 거죠.”


흙수저 남한 남편, 금수저 북한 아내

드라마틱한 걸로 치자면 부인 김씨의 삶도 남편 못지않다. 함경북도 청진 바닷가가 고향인 김씨는 아버지가 지역에서 당 간부였기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편 이씨가 흙수저였다면 부인은 금수저였던 셈이다. 스무살 때 쯤이다. 김씨는 매일매일이 즐겁고 행복해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했을 정도다. ‘내겐 어쩜 평생 불행이 찾아올 것 같지 않다. 난 지금 이렇게 행복하니까.’ 그렇게 다짐을 했던 스무살 해, 다짐과 달리 엄청난 불행이 그녀에게 닥쳤다.

“대학교 때 학교에서 송이버섯을 따오라고 하는데 어딜 가서 송이버섯을 따겠어요? 그래서 엄마 친구 아들한테 부탁을 해서 버섯을 따왔는데 그러면 학교에서 선물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집은 잘 사니까 안줘도 된다고 하고 안받았어요. 그런데 그걸 왜 안받았냐, 어서 받아오라고 엄마가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몰라요. 엄마는 못배운 사람이라서 얼마나 나한테 욕을 하면서 구박을 하는지, 저는 구박하면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엄마가 매일 그것 때문에 저한테 욕을 하는데 어느 날 내 속에서 욱 하는 게 올라오는 거예요. 우리 동네는 동해바다 옆이라 정어리가 굉장히 많이 났어요. 비누가 귀하다보니 집집마다 양잿물을 조금씩 가지고 있었는데 정어리 푼 물에다가 양잿물을 쏟으면 곧바로 비누가 되는 거죠. 남편은 겁이 많아 자살을 못했다고 했지만 저는 단호합니다. 죽겠다고 했으면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하고, 뭐 하겠다 했으면 그 자리에서 해야 하는 성미죠. 그래서 아버지가 나보고 늘 ‘대쪽 같다’고 했어요. ‘쟤는 치마만 입었지 사내 새끼다’는 얘기도 많이 듣고 자랐고요. 엄마가 저한테 막 욕을 하는데 마침 내 옆에 양잿물이 있는 겁니다. 그걸 컵에다가 따랐어요. 그리고는 엄마에게 ‘엄마, 내가 이것 삼키나 안 삼키나 봐봐’ 하면서 한 모금을 딱 먹었습니다. 그런데 목이 타는 느낌이 나는 거예요. ‘악~’ 소리를 지르면서 또 한번 더 마셨어요. 죽기로 한 거니까요. 그때 마침 아버지가 그걸 보시더니 ‘야 뭐야?’ 하시면서 빗자루를 던졌는데 그게 내 팔에 맞으면서 컵이 떨어진 거예요. 이게 페인트벽에 튀었는데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는 거예요. 여기저기 고함소리가 나고 옆집에서 사람들이 다 뛰어왔어요. 내 혀가 막 말려들어가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내 입에다 나무를 대고 쌀 씻은 물을 막 부었어요. 그랬더니 시커먼 피가 내 입에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3번 정도 토하고, 병원에 데려갔는데 얼마 후 정신이 드는 겁니다. 북한에서는 양잿물 먹으면 체제를 반대해서 그랬다고 ‘반동’이라고 부릅니다. 딱 깨어나서 드는 생각이 ‘내가 아버지 어머니를 욕되게 하면 안되겠다’는 거였어요. 그게 탈북을 결행한 동기 중 하나가 된 거죠. 제가 그렇게 독했어요.”


길가다 만난 인연

김씨는 1997년 탈북 후 중국을 거쳐 대한민국 입국 후 할머니의 고향인 충청도로 왔다. 남편 이씨를 만난 것도 드라마 같은 면이 많다.

기자: 두 분은 어떻게 만났나요?

김씨: 지나가다 만났어요. 주일 날.

이씨: 맞아요. 길을 지나가다 만났어요. 제가 다니는 교회에 탈북민이 한 명 있었는데 3주가 지나도 안나오길래 걱정돼서 찾아갔는데 길에서 친구랑 만나서 얘기를 한참 하고 있는 겁니다. 그때 처음 만난 거죠.

진짜 길 가다가 만난 게 맞다. 역사는 그로부터 두 달 쯤 후 일어났다. 이씨가 선을 보고 몇 번 만나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마침 이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가씨 부모가 찾아온 거다. 식사를 대접하러 식당엘 갔고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 갔는데 거기에 김씨가 있는 게 아닌가. 김씨는 마침 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씨의 설명이다.

“두 달 전 만났던 분이니까 ‘집사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하고 물었는데, 대답은 안하고 한 1분 정도 저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만나서 얘기 좀 합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난 ‘내가 아파보여서 그런가?’라고 생각했죠.”

결혼 여부를 확정하는 결정적인 날에 이씨는 왜 김씨를 빤히 쳐다봤던 걸까. 

이씨의 설명이다. “그때 신앙생활 3년차인데 탈북여성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이 굉장히 슬퍼지더라구요. 나중에 보니까 그게 긍휼의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 아가씨는 한국 사람이고 또 부모님도 계시고 다른 남자 만나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으니까 보내도 괜찮겠다 생각한 거죠.”

그후 두 사람이 다니던 교회 목사가 두 사람의 결혼 얘기를 꺼냈고 그때부터 일사천리로 결혼이 진행됐다. 식당에서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 전에 우여곡절도 있었다. 상견례에서다. 이씨는 부인 김씨에게 미리 언질을 해놨던 터다. ‘남자들이 있든 말든 네가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라’고. 예상대로 남편 이씨의 형제들 중 한 명이 깐깐한 질문들을 던지는 거였다. 북한에서는 왜 탈북했나, 남한에 온 탈북자 중에 간첩도 있다더라 뭐 그런 내용이었다. 김씨는 머뭇거림 없이 당당하게 답변했다. “간첩이 뭣하러 이런 시골에 있겠습니까? 서울에 있지.” 김씨의 재치있는 답변에 형제들도 질문을 포기한 것 같았다. 이제 결혼식만 올리면 될 거였다.

결혼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김씨는 옥상에 혼자 올라가 술잔을 비웠다. 며칠 후면 남편이 될 이씨는 사실 김씨가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더군다나 김씨는 이 시골에서 계속 살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서러웠다. 자신의 젊음, 자신의 꿈을 다 접어야 한다는 것이. 하늘을 향해 울면서 삿대질을 했다. “하나님, 왜 하필 이인숩니까? 내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며칠 후, 이제 그야말로 결혼식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다. 결혼 전까지 김씨는 같은 탈북민 친구의 집에 얹혀 살고 있었다. 그 친구가 그러는 거다. “언제까지 짐을 내 방에 둘 건가?” 어쩔 수 없이 여러 개 배낭에다가 짐을 쑤셔넣고 걸어서 5분 거리인 이씨의 집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불현 듯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내가 이 사람한테 시집오려고 탈북을 해서 여기까지 왔나보다. 내가 탈북하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여기까지 온 것은 배우자를 얻기 위한 것이었나 보다. 하나님은 내가 탈북하기 전에 이미 나를 향한 계획을 갖고 계셨고, 신랑까지 다 예비해놓으셨던 거다.’ 마음속 불안과 불평의 먹구름은 확 걷히고, 확신과 소망의 햇살이 내리쬐었다. 2007년 10월 21일 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에 골인했다. 마침 기자가 두 사람을 만난 날은 결혼기념일 약 한 달 쯤 뒤였다. 김씨는 지난 10년간 충청도 생활에 얼마나 빨리 적응했는지 충청도 사투리로 곧잘 웃겼다.

기자: 10주년 결혼기념일에 어디 다녀오셨나?

김씨: 아니다. 우린 그런 것 모른다.

기자: 그럼 문화생활 전혀 안하신다는?

이씨: 나도 결혼 전엔 여자친구만 생기면 전국을 다니겠다고 했었다. 이 손바닥 같은 부여에만 있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그런데 실제 결혼 하고서 못다녀봤다. 성격 자체가 다니는 걸 싫어해서….

김씨: 생전 어딜 가는 걸 못봤다. 나도 처음엔 기대했다가 안가니까 슬펐는데 이제 포기하니까 마음이 되게 편안해진다. 포기하니까 마음이 편하다.

이씨: 사람이 4차원(신앙) 세계에 빠지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김씨: 이젠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 다니는 것도 힘이 있을 때 다녀야지 이젠 힘도 없고.

기자: 이제라도 많이 다니시라.

김씨: 야.

기자: 충청도 사투리 잘하시는데?

김씨: 그럼요. 11년째 살고 있는데.

기자: 벌써?

김씨: 이(‘예’라는 뜻의 충청남도 사투리. ‘야’보다 더 진한 억양의 사투리다). 예전에 식당 갔더니 ‘시기 너쓰 니기 너쓰’라고 하더라. (세 개 넣었어? 네 개 넣었어? 라는 뜻이다)

성격이 적극적이고 활달한 김씨는 어딜 가나 적응을 잘한다. 충남도지사도 몇 번이나 만나봤고, 부여군청 공무원들 앞에서 강의도 했었다. 지금도 충청남도를 대표하는 탈북민 하면 김씨를 꼽는다. 그러니 남편 이씨 입장에서는 김씨의 역량이 커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편 이씨는 염세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했지만 반면에 어릴 적부터 통일을 꿈꿔왔던 사람이기도 하다. 탈북민 부인을 만난 건 하나님의 섭리도 있지만 어쩌면 통일을 위한 섭리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통일은 된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과는 좀 달랐던 것 같아요. 딱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통일은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후 20대 때 주위에 유학 갔다온 친구가 있어서 통일에 대해서 물었어요. 그때부터 더욱 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통일은 된다’ ‘통일이 되어야만 우리나라가 살 수 있다’고 외치고 다녔죠. 지리적으로 봐도 통일이 되어야 육지, 바다로 뻗어나갈 수 있고, 이것저것 항공료, 배 비용 다 따져봐도 통일이 되어야 경제강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했던 것 같아요.” 심지어는 탈북민들을 만나도 “통일 준비해야 한다. 멀지 않았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통일이 온다”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씨가 생각하는 통일이 빨리 된다는 근거는 뭘까. 이씨는 “북한도 그렇고 남한도 그렇고 통일을 막기 위해 강경정책을 쓰는 걸 보면 통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더욱 갖게 되죠.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마귀도 발악을 했던 것처럼 통일에 대해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그만큼 통일이 가까이 왔다는 반증인 거죠.”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일견 그럴 듯 해보인다. 그렇다면 탈북민과 결혼해서 10년을 살았으니 통일에 대한 확신 여부도 더 분명해지지 않았을까. “확실히 확신이 생기죠. 저는 지금도 여기서 사는 게 행복한데, 통일되면 고비는 있겠지만 더 좋아질 거란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 흡수통일 되면 안되고, 남북을 그대로 둔 채 일하고 싶은 사람만 서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면서 일하는 거죠. 남북은 말만 통하지 사고 자체가 다르다보니까 안통하는 게 많아요. 대신 개성공단 같은 공장을 여러 개 짓고, 북한의 명소들을 관광단지로 키우는 게 좋은 방법일 것 같아요.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게 북한한테도 필요한 것 같아요.”


갈아만든 건강식품이 대세가 되는 날까지

건강원 10년에, 과일즙 10년을 해온 이씨. 무엇보다 이씨는 자신의 제품에 대한 확신이 있다. 제품 연구, 개발을 거쳐 완성품을 내기까지 직접 발품을 팔아 국내 최고의 상품을 직접 찾아가 자신의 제품을 테스트해보기 때문이다. 최고의 상품을 가진 전문가가 자신의 제품을 인정할 때 비로소 시중에 내놓는다. 일종의 장인정신이 있는 셈이다. 그의 제품이 가랑비에 옷 젖듯 꾸준히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다. 그에겐 꿈이 있다. 대세가 되다시피 한, 원료 자체는 몇 %밖에 함유되지 않았다고 믿는 농축액이나 엑기스 제품 말고 자신이 고집하는 끓이지 않고 갈아만든 제품이 진정한 건강식품의 대세가 되는 것, 먹어서 사람에게 좋은 것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라도 갈아서 담아내는 것!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대형마켓 같은 유통망 확보가 필요하고, 대량 생산을 위한 공장도 대리점도 필요하다. 갈 길이 멀다. 그가 그토록 답답해하고 하나님께 불평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씨가 기도만 하고 불평만 늘어놓는 건 아니다. 늘 연구를 한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몸에 좋은 제품을 만들어낼까. 상품 포장의 카피부터 가게 앞 광고 문구까지 고민한다.


“어느 날 찬송을 부르는데 아무리 불러도 감동이 안되는 겁니다. 왜 그러지? 했는데 하나님이 새 것을 좋아하신다는 걸 알았어요. 새 마음, 새 노래로 불러야 하는데 종교적으로 형식적으로 부르다보니 그게 감동이 될 리가 없는 거죠.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는 모든 게 새롭고 아름다웠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것, 하나님이 그걸 좋아하신다는 거죠. 사람들도 새것을 좋아한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죠. 제가 새 제품 개발에 끊임없이 골몰하는 이유입니다.” 남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부인 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다. “잘했어. 재미있어.” 부여에는 이씨·김씨 커플 말고도 6쌍의 남남북녀 커플이 더 있다. 시골이다 보니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정기적으로 만나 회포도 푼다. 그들 6쌍의 커플도 두 부부처럼 알콜달콩 살아가고 있다는 전언이다. 무엇이 부여의 남남북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어쩌면 부여의 지형에서 풍기는 온화하고 소박한 기운 때문은 아닐까.



멋진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김명희, 이인수 부부의 상품은 통협몰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제품명을 클릭하시면 통협몰로 넘어갑니다.)


 통째로 먹는 초롱초롱 블루베리

 통째로 먹는 통큰 토마토

다함께 기운충만 숙성칡즙


4 2